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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올라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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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boss4kr 2023. 10. 9.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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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주말이면 등산을 하는 루틴이 생겼다. 서울에 있는 산들을 이곳저곳 다니면서 멀리있는 높은 산에 가고 싶다는 용기가 생겼다. 설악산 대청봉은 힘들거 같아서 지리산 천왕봉이나 한라산 백록담을 점 찍어두고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한라산을 올라가기로 했다.
 
1. 준비물: 장비(스틱, 무릎보호대, 아이젠, 장갑, 모자, 넥워머, 선글라스, 속옷, 겉옷), 간식(커피, 사과, 바나나, 에너지바, 사탕, 초코파이), 기타(셀카봉, 수건, 물통)
 
2. 교통
제주공항에서 시외버스터미널은 택시로 이동 (3km),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성판악은 버스로 이동 (781번, 781-1번, 40분 소요, 18개 정류장)
하산은 관음사 방향으로 하므로 관음사에서 제주대학교까지 버스로 이동 (77번, 17분 소요, 5개 정류장), 제주대학교에서 공항까지는 버스로 이동 (37번, 500번, 40분 소요, 25개 정류장)
 
3. 식사
아침은 성판악에서 해결하면서 생수(4개), 따뜻한 커피, 김밥(점심)을 준비
저녁은 제주시청 근처에 있는 솔지식당, 유리네에서 도라지/생선구이/고등어회(겨울)/방어회(가을)
 
4. 기타
서울에서 첫 비행기로 출발
저녁식사 후에 개운하게 근처에서 사우나 하고 마지막 비행기로 귀경 (비행기에서 꿀잠자기)
 (2017.03.31)
 

[백록담 전설]
 
예부터 제주 지역 사람들은 한라산의 백록담에 산다는 백록(白鹿)은 신선이 타는 동물이라고 믿었다. 한라산은 원래 신선이 놀던 산이고, 신선들은 흰 사슴, 곧 백록(白鹿)을 타고 구경을 다니며 정상에 있는 백록담의 맑은 물을 사슴에게 먹인다는 것이다. 백록담의 이름은 이 백록에서 유래하였다. 「백록담 전설」은 실수로 백록을 잡았으나 잘못을 빌고 살아남았다는 사냥꾼의 이야기이다.
 
옛날 교래리 감발내〔川〕 근처에 안씨라는 포수가 살았다. 안씨는 평생을 사냥꾼으로 살았는데, 무엇이든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이었다. 어느 날 한라산에서 사냥을 하는데, 숲에서 사슴이 한 마리 내달리자 무의식적으로 총을 쏘고 달려가서 순간적으로 칼을 빼어 사슴의 배를 찔렀다. 그런데 정신이 들어 살펴보니 백록이 죽어 있었다. 안씨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 자리에 엎드려서, 몰라보고 대죄를 범했다면서 머리를 땅에 대고 극진히 빌었다. 그래서인지 안씨는 죽지 않고 한라산에서 살아서 내려와서 140세까지 살았는데, 만약 정성을 다해서 빌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한다.
 
「백록담 전설」은 우연히 잘못을 저질러 죽게 될 운명이었으나, 정성을 다해 빌어서 죽음을 모면하고 장수하였다는 이야기이다. 한라산 백록담에는 신선이 살고 있고, 신선은 흰 사슴(백록)을 타고 다닌다는 신선 사상이 반영된 설화로서, 신성한 동물을 해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는 터부가 담겨 있다.

 
[성판악 이름 유래]
 
한라산 주봉의 동쪽 산사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오름으로, 정상부는 북쪽을 주봉으로 남쪽과 남동쪽에 작은 봉우리가 형성되어 있다. 사방에 크고 작은 골짜기가 패어 있고 전 사면이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다. 오름의 동남쪽 사면으로 수직의 암벽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모습이 마치 널빤지를 쌓아 성을 만든 것처럼 보인다 하여 '성널오름'이라 불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판악(城板岳)'으로 표기했는데, "석벽이 성널[城板]과 같아서 붙인 이름이다."라고 했다. 『탐라십경도』의「서귀진」에도 '성판악(城板岳)'이라 기재했고, 오름의 모습을 마치 널빤지를 쌓아 올린 성처럼 묘사했다. 『탐라순력도』(산장구마)와 『탐라지도병서』, 『제주삼읍전도』에는 '성판악(成板岳)', 『대동여지도』와 『정의군읍지』의 「정의지도」에는 '성판악(城板岳)'으로 수록했다.

 
[관음사 역사]
 
한라산 650m 기슭에 자리한 관음사는 제주의 30여 사찰을 관장하는 제주불교의 중심이다. 그 힘의 근원은 제주의 불교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제주의 여러 신화, 전설, 민담에 관음사를 괴남절(제주 방언으로 관음사), 개남절, 동괴남절, 은중절이라고 민간에 유포되어 전해온다. 고려성종때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등람에 관음사의 기록이 남아있으며,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던 사찰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다 유교를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의 지배자들이 1702년 이형상목사에 의해 제주 지역 사찰이 전부 훼철되면서 관음사도 사라지게 되었다.
 
200년의 명맥불교를 유지하다, 지난 1909년 안봉려관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스님은 지역의 반대에 부딪치는 어려움 속에서도 해월굴에서 3년간 관음기도를 드리며 법당과 요사를 완공하기에 이른다. 뒤이어 통영 영화사 등지에서 불상과 탱화를 모셔와 여법한 사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절의 외형을 갖추는 불사가 일단락되자, 제주 중심지인 중앙로에 시내 포교당인 대각사를 세워 제주 도민과 함께 호흡하는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펼친다. 이로 인해 오랜 시간 맥이 끊겼던 제주의 불교가 관음사를 중심으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939년 불이나 대웅전 등이 모두 불타 없어지면서 관음사도 질곡에 찬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고 만다. 이어 1948년 제주 4·3사건 당시 관음사의 위치가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토벌대와 입산 무장대가 관음사를 중심으로 상호간 첨예하게 대치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관음사는 모든 전각이 전소되었다.
 
한라산이 입산금지가 풀리면서, 지난 1969년부터 대웅전을 시작으로 선방, 영산전, 해월각, 사천왕문, 일주문, 종각 등이 차근차근 불사가 이루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